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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문화생활

오월애.. 3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아픔


 

어느덧 벌써 오월이 왔고, 여지없이 5.18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18일은 조용히 지나갔다.

여울에서는 일한이가 기청아 광주 기행에 다녀왔다. 
마침 다녀오는 토요일엔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하늘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일한이의 기행이 분위기에 따라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던 나에겐 다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자극이 되었고
여느 단편영화들이 늘 그렇듯이 오월애도 좀 있으면 막을 내릴것 같아 여울 식구들과 보러가기로 했다.
 

장소는 성북동의 아리랑 씨네센터.
성신여대에서 따끈한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6번 출구로 나와 쭈욱 걸어갔다. (예상보다 버스 두정거장의 간격이 매우 멀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로,
5.18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기억과 지금의 모습을 담은 인터뷰를 모은 것이다.
다양하고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당시의 계엄군이라 고백한 분, 시민군이었던 분, 시위대에 주먹밥을 날라다 주신 아주머니,
도청에서 취사조로 함께했던 여고생들...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광주가 아파했던 날에 함께 고통하고 함께 싸워갔었구나....
계엄군이던, 시민이던 숨어있는 권력 앞에 광주 사람들 모두가 희생되었었구나...
그 열흘간, 고립된 채 목숨을 지켜야 했던 그들은 끔찍히도 고독한 날들을 보냈었겠구나...
이 영화를 접하고서야 느꼈다.


하나의 주목할 점은,
당시 광주사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학생 혹은 노동자들이었으며
현재의 모습 또한 여전히 시장이나 화원, 중화요리집 같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를 회고하는 한 기자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때, 광주가 군부로부터 고립되었을때 대부분의 잘 사는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다"고.

억울하다.
이들은 무얼위해 그렇게 피를 흘리고 동지와 가족들이 죽어가는 걸 보아야만 했을까.
도청에서의 마지막 싸움이 끝나고, 그들은 누구를 위해 수개월간의 고문을 감당해야 했을까.




참... 이름도 오월 화원이다.
그러면서 세상을 떠난 동지들을 기억하며 여기를 지키시는 아저씨는
매년 '오월이 빨리 갔으면 한다'는 것이다.

 



의리파 평화반점 아저씨.
아저씨도 당시 함께 시민군으로 싸우셨다고 하신다.
아내 되시는 아주머니의 아주 쿨하고 구수한 인터뷰가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다.
"그냥 확 썰어부러잉~" ㅋㅋㅋ
아저씨는 작년 5.18 기념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금지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비장한 목소리로 그 노래를 외치셨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처참한 학살을 기록한 눈물의 일지.



전남도청 별관.
여전히   한 모습은 이 별관으로 인한 갈등에서도 나타난다.
별관을 부수고 새로운 기념관인가 뭐시긴가를 만든다는 광주시의 계획으로 부상자회와 유족회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애매모호하고 흐릿한 역사는 피흘렸던 사람들을 갈라놓고 더 고통스럽게 한다.
도대체 동지를 잃은 사람들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무엇때문에 이 장소를 지키려고 하는지,
답답한 꼰대 정부 관료님들은 좀 가슴으로 이해했으면 한다.
그 미적으로도 아름답지도 않은 삐까뻔쩍 새 건물만 만들어서 어려운 영어이름 지어놓으려고 하지 말고 말이다.
맨날 무슨 아시아 중심도시니, 경제 발전 지역발전이니 이런 소리나 하고 있고.
정말 미술 하는 사람들 눈에도 그런거 하나도 어울리지 않고 예뻐 보이지도 않는다구요. 아저씨들. 쫌....
(하아.. 갑자기 오세훈이 생각나서 열받았네...)








내내 인터뷰를 거절하시다 겨우 마지막에 입을 떼신 아주머니.
나는 오히려 해주셨던 얘기들보다 손사래를 치며 인터뷰를 거부하시는 그 모습을 통해서
5.18 당시가 어떠했는지, 그것이 어떤 아픔이었는지를 더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전에 비엔날레 때문에 광주에 내려갔을 때, 양동시장에 가서 치킨을 먹었었는데 그곳 시장의 많은 아주머니들이 5.18 당시 함께 했던 분들이란걸 영화를 통해서야 알 수 있었다. 다시 영화로 보니 반갑기도 하고 그땐 참 아무의미없이 그냥 '시장'으로 만 봤구나 싶어 아쉽기도 하다.



내가 사는 곳,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위해 단순히 그걸 위해 뛰쳐 나갔던 많은 사람들은 이미 목숨을 잃었고,
그렇게 허무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눈물이 말라있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아직도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폭도'로 불리기도 하고 있었다.
이들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5.18 민주화 운동이 광주 사람들이 일으킨 광주에서만의 사건이라 여기면서
30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까지 얘기를 하냐고 하는 사람들의 시큰둥한 반응들이었다.
정부는 물론 우리도 이 순수하고 소박했던 광주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아직도 그때의 후유증 (당시의 기억과 수개월의 고문 후유증)으로 자살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더 시간이 가기전에 우리의 일로서 해결해야 함을 느낀다.
정말 대머리 아저씨 전씨는.... 후....
깝깝하다. 
이 한 인간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당해준 당시의 광주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만간 꼭 한번 망월동 묘지를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현장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끔찍한 학살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그곳에 함께했던 광주 시민들의 모습은 아름답고도 감동적이었다.


* 유네스코에 제출된 5.18 관련 기록물이 등재 승인이 됐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좋은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빨리 진상규명과 사죄가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